Opening Act:

파멸을 부르는 아름다운 목소리, 세이렌

Elizabeth de la Guerre: Menuet from Suite in D Minor

글릿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유념하는 모토가 있습니다. 음악사에서 소외되어 온 ‘여성’을 조명하자는 것인데요. 여성 작곡가는 물론 연주자, 그리고 이들이 음악에서 소비되는 방향성을 꾸준히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신세 지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만복당에서 펴낸 <세이렌의 노래(2019)>. 여성 작곡가 20명의 삶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에서 글릿이 이제껏 소개했던 많은 여성 음악가의 더 깊고 넓은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어요🤓 글리터들도 예전부터 피드백란을 통해 이 책 많이 추천해 주셨는데요. 역시 글릿과 글리터는 통하는 사이인가 봐요.

책의 제목을 한번 볼까요. '세이렌'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로, 오늘날 위험을 알리는 경보음 ‘사이렌’의 어원입니다.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해 결국 파멸에 이르게 했다고 해요🛶 원정에서 돌아오던 오디세우스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밀랍으로 만든 귀마개를 했다는 것은 유명한 신화죠. 이처럼 아주 고대적부터 여성의 목소리는 시끄럽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였어요. 그러나 역사 속 수많은 여성 음악가는 오히려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억압받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세이렌'이라 손가락질 받았음에도, 이들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뻗어나갔습니다💁🏻‍♀️

Main Act:

뜻이 있는 곳에 길도 있다

Cécile Chaminade: Callirhoë Suite

세실 샤미나드도 책에 등장하는 작곡가 중 하나입니다. 여성 작곡가로서 처음으로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은 샤미나드는 우리에게 "카르멘"으로 잘 알려진 조르주 비제에게 재능을 인정받고, 그를 사사했어요. 샤미나드가 정식 교육기관이 아니라 개인 레슨에 그치게 된 데는 아버지의 입김이 셌다고 합니다. 스승인 비제가 파리 음악원 입학을 권유했지만, 현모양처로 키우겠다며 고등 교육을 거부하였거든요😨 이후 아버지로부터 “연주 금지령”까지 내려지는 등 집안의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샤미나드는 꾸준히 작품을 만들며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이후 대중에게도 자신의 작품을 공개하며 인지도를 쌓아가던 샤미나드는 1888년 발레 “칼리로에(Callirhoé)"를 발표하며 대성공을 거둡니다. 초연 이후 이 곡은 파리의 가장 명망 있는 극장인 오페라 코미크(Opéra-Comique)에서 공연되었고, 샤미나드는 발레 음악으로 유명한 레오 들리브의 후예라는 평가를 받았죠👏🏻 샤미나드는 이 극의 음악을 -극 부수 음악이 많이들 그러하듯- 모음곡 형태로 편집하였어요. 그리고 이 곡은 오히려 원래 발레극보다도 사랑받는 모음곡이 되었죠. 특히 3악장은 특히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하네요.

발레의 내용은 제목에서와 같이 '칼리로에' 신화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에서 다룰게요!

More...:

복수는 복수를 낳고

Gluck: "The Dance of the Furies" <Orphée et Eurydice>

칼리로에(Callirhoé)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물의 신 애키로우스(Achelous)의 딸입니다. 많은 행성의 이름이 그리스-로마 신화 속 인물의 이름을 따른 것처럼 목성의 17번째 위성의 이름이기도 하죠. 뛰어난 미모로 유명했던 칼리로에는 어머니를 죽인 죄로 떠돌던 영웅 알크메온(Alcmaeon)과 사랑에 빠집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를 죽인 그는 그 죄로 복수의 세 여신에게 쫓김을 당하던 신세였지만, 칼리로에와의 결혼을 통해 새 삶을 살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업보로 인해 결국 살해당하고, 남편을 잃은 칼리로에는 제우스에게 가족의 복수를 요청하지요. 복수가 복수를 낳는 꼴이 되었네요🫢

그리스-로마 신화에는 유독 세 여신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에리니에스'라 불리는 '복수의 세 여신'도 그중 하나입니다. 뱀 머리칼을 휘날리며 피눈물을 흘리는 이들은 원한을 산 이를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며 복수하는, 집념이 강한 신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퓨리(Fury)'라 불리며, 이는 '분노'를 뜻하는 영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어요.

강력한 생김새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무시무시한 행동력으로 많은 예술 작품의 모티브가 된 이 세 명의 신은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속 "퓨리이의 춤"에서 재연됩니다💔 극중 퓨리들은 오르페오의 사랑과 용기가 진실한지를 가늠하기 위해 그를 위협하고,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존재로 등장하는데요. 이러한 갈등이 극대화되는 동안 음악은 점점 격렬해지며 저승의 법칙과 인간의 감정이 충돌하는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특히 현악기의 반복적이고 빠른 움직임을 통해 이들이 가진 초자연적인 긴장감을 표현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