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피협에 가려진 라흐마니노프 Sergei Rachmaninoff : Piano Concerto No. 2 Op. 18
글릿은 음악에 얽힌 이야기들을 읽어내려고 합니다. 곡의 면면을 들여보다 보면 익숙하던 선율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곡의 숨겨진 비밀을 발견하기도 하죠. 이때 그 곡을 작곡한 음악가의 삶에서 힌트를 찾곤 합니다🕵🏻♀️
'라피협'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바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의 줄임말인데요. 국내 유수의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하여 우리는 그의 이름도, 음악도 잘 알고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라흐마니노프를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낭만적인 음악, 큰 손, 우울한 이미지 정도가 그나마 익숙하게 느껴지려나요.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그렇게 단순히 나열하기에는 너무 입체적인 사람이었어요. 시대 앞에 무력한 개인의 모습,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새로운 터전에서 개척해 나가는 사람. 이것이 우리 에디터들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를 읽고 마주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였습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책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를 통해 제정 러시아가 몰락하던 시기의 한 러시아 작곡가와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공기를 함께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피아니스트로 잘 알려진 라흐마니노프의 생애 가장 마지막 작품은 "교향적 춤곡"입니다. 피아노곡이 아니라는 점이 좀 의외죠? 이 시기는 라흐마니노프 사망 3년 전 즈음으로, 암으로 고생하던 시기에 작곡하여 직감적으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걸 느꼈는지 친구들에게도 이 곡을 “마지막 명멸하는 불꽃”이라고 표현했다고 해요.
라흐마니노프는 전에 작곡했던 몇 곡을 이 곡에서 인용합니다. "종", "회화적 연습곡"과 같이 아리송하게 차용된 것이 있는가 하면, "교향곡 1번"처럼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있지요. 이처럼 그의 음악 인생을 담아낸 마지막 역작은 비록 한 비평가에 의해 "작곡가의 후기 작품 중에는 최고"라는 미약한 칭찬만을 받았지만, 이마저도 명멸하는, 즉 깜빡거리며 사라져가는 불꽃과 같은 인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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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음악의 두 주역은 뉴욕에 산다 Igor Stravinsky : The Rite of Spring
20세기 초 미국에는 망명과 이민으로 건너온 외지인들로 붐볐습니다. 뉴욕에 러시아인을 위한 식료품점과 음식점, 작은 공동체가 생겨난 것도 그 무렵이었죠. 그때의 미국인들에게 러시아는 여전히 낯설고 신비로운 나라였습니다. 러시아 문화는 동양을 바라보듯 몇 가지 이미지로 간단히 소비되곤 했고, 이런 시선은 러시아 출신 예술가들이 타지에서 서로 뭉치게 된 배경이 되었어요.
라흐마니노프의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만드는 건 같은 시대를 살면서 같은 이유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음악가들입니다. 프로코피예프,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등이 있죠. 그중 스트라빈스키와는 음악적으로는 꽤 다른 길을 걸었고, 실제로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그가 새로운 나라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의 운명을 바꾼 기획자 디아길레프와 발레리노 니진스키도 라흐마니노프를 통하지 않았더라면 만나기 어려웠을 테죠. 이처럼 혁명 이후 유럽과 미국으로 흩어진 음악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음악 언어를 만들어갔고, 서로 의지했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서로를 의식하고, 때로는 거리를 두기도 했습니다.
살았던 시대, 함께 숨 쉬었던 음악가들, 국가적 상황과 망명이라는 선택은 예술가의 삶을 어떻게 바꿀까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를 읽으며 우리는 한 명의 음악가를 넘어, 격변하던 20세기 초의 풍경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